거룩, 완악함, 그리고 하나님의 선교: 선교적 해석학으로 읽는 이사야 6장

하나님의 선교(Mssio Dei)를 “하나님이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고, 모든 민족을 자신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행하시는 ‘보내시는 활동’”으로 정의할 때, 그 선교적 역사 속에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아 보냄을 받은 핵심적 인물들이다.[1]  그 가운데서도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자원한 이사야는 이 구절의 익숙함에 가려진 낯설고 불편한 사명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

이사야 6:8은 교회 사역과 선교사 파송의 현장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본문 가운데 하나로, 일반적으로는 헌신과 결단, 그리고 그 헌신이 장차 긍정적인 열매와 성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읽혀 왔다. 그러나 이사야 6장을 끝까지 읽어보면, 이사야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영웅적인 선교지원자”의 모습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위치에 서 있음을 보게 된다.[2]

이사야가 받은 사명은 즉각적인 회심이나 공동체의 성장, 가시적인 갱신을 기대할 수 있는 사명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백성이 듣되 깨닫지 못하고, 보되 알지 못한 채 완고함 가운데 회개하지 않아서 심판이 확정되도록 하기 위해 ‘보냄’ (שׁלח)을 받는다(사 6:9-10).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시지만, 그 보냄의 목적은 회개와 구원의 즉각적 성취가 아니라 거부의 지속과 완고함의 심화이다. 그렇다면 이사야 6:9-10에 나타난 이 ‘완악하게 하는(hardening) 사명’은 하나님의 선교라는 관점에서 어떤 신학적 의의를 지닐 수 있을까?

거룩하신 왕 여호와와의 만남에서 시작되는 ‘보냄’

이사야의 사명은 인간의 헌신이나 종교적 열정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이사야 6장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압도적인 계시로 시작된다. “웃시야 왕(הַמֶּלֶךְ עֻזִּיָּהוּ)이 죽던 해”(사 6:1)라는 서두는 단순한 연대기적 표지가 아니라, 약 반세기 동안 유다를 통치했던 인간 왕의 죽음이 초래한 정치, 사회적 불안정성과 시대적 전환을 암시한다. 내부적으로는 강력한 지도자의 부재 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증폭되었고, 지도층의 부패와 무능, 방탕과 사리사욕으로 인해 사회적 불의가 만연해 있었다. 백성들은 현실의 삶에 만족을 주는 우상숭배와 혼합주의적 신앙에 빠져 영적 감각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외부적으로는 앗수르 제국이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며 중동의 소국들을 압박하던 시기였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불안의 한가운데서 이사야는 “높이 들린 보좌” 위에 앉아 계신 왕, 곧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 הַמֶּלֶךְ יְהוָה צְבָאוֹת)(사 6:5)을 본다. 인간 왕의 유한성과 역사 질서의 불안정성이 극대화된 순간에 계시된 이 환상은, 역사의 흥망성쇠를 초월하여 영원부터 영원까지 다스리시는 참된 왕의 통치를 선포한다. 이사야의 사명은 바로 이 초월적 왕과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스랍들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하도다”라는 외침은, 야훼가 이스라엘의 성전에 국한된 신이 아니라 온 땅을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드러낸다.[3] 이사야의 이 개인적 경험은 장차 이스라엘이 “초월적으로 유일한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식하게 될 것을 예시하며, 더 나아가 온 세상이 하나님을 그렇게 알게 될 미래를 전망하게 한다.[4]

구약에서 여호와의 거룩함은 그분이 피조물과 질적으로 구별된 존재임을 의미할 뿐 아니라, 언약 관계 안에서 윤리적 요구를 수반한다(레 19장). 하나님의 ‘보냄’은 바로 이 거룩함이 이스라엘과 열방의 현실 속에 침투하여 드러나게 하는 활동이다. 이러한 거룩함은 인간이 구축해온 사회 질서와 가치 체계, 그리고 자기 정당화의 구조를 해체하고 전복하는 급진적 변화를 요구한다. 따라서 이사야에게 주어진 사명은 필연적으로 ‘부정한 입술’을 가진 백성들의 세계와 충돌할 수밖에 없으며, 저항과 거부 속에서 수행될 수밖에 없다.

거룩함 앞에서의 절망과 정결: ‘보냄’ 이전에 요구되는 과정

여호와의 압도적 거룩함 앞에서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외친다(사 6:5). 하나님의 거룩함은 인간에게 따뜻한 안락함과 위로를 제공하는 경험이 아니라, 그 앞에 선 자로 하여금 자신의 죄에 대한 즉각적 인식과 죽음을 초래하는 위협적 현실이다.[5] 이사야는 야훼의 거룩함 앞에서 자신의 절망적 상태를 직감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동시대의 백성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모두 여호와의 거룩함 앞에 ‘부정한 입술’을 가진 자들이며, 거룩하신 여호와와 공존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여호와의 거룩함은 자신의 부정함과 죄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자에게 용서를 제공한다(6:6-7).[6] 제단에서 취해진 핀 숯이 이사야의 입술에 닿자, 그는 속죄를 경험한다. 그리고 바로 이 죄 용서를 경험한 이사야는, 여전히 부정함과 죄 가운데 머물러 있는 ‘이 백성’(사 6:5, 9-10)에게로 보냄을 받는다.

이사야 6장의 서사는 ‘보냄’을 받은 자에게 근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개인의 역량이나 열정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것은 압도적으로 거룩한 우주의 통치자 앞에서 자신의 절망적 상태를 인식하고, 그 거룩함으로부터 죄 사함과 회복을 경험하며, 거룩하신 여호와의 메신저로 부름 받기에는 자신이 본질적으로 부적절한 존재임을 깊이 자각하는 것이다. ‘부정한 입술’을 가진 백성, 곧 죄로 인해 더러워진 백성에게 나아가 여호와의 거룩함과 그의 심판과 용서를 선포하기에 앞서, 이러한 과정은 반드시 ‘보냄’을 받은 자 자신에게 선행되어야 한다.

이사야서 전체의 메시지는, 이사야의 이 죄 사함의 경험이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이스라엘의 민족적 죄 용서에 대한 신학적 확신으로 확장되며, 더 나아가 모든 민족에게 적용될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가능성을 예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 확신 때문에 이사야는 당대의 거부와 가까운 미래에 임할 심판의 현실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보냄 받은 메시지를 끝까지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보냄’은 체계적인 선교 훈련이나 신학교 교육을 마친 자에게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자격이 아니라, 거룩하신 여호와 앞에 서는 이 과정을 통과한 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감격과 신뢰 위에서 감당하도록 맡겨지는 사명이다.

완악함을 낳는 선포: 거부를 수반하는 사명(이사야 6:9-10)

이사야 6장의 신학적 논쟁의 핵심은 9-10절에 있다. 이사야는 백성을 깨닫게 하거나 돌이키게 하기 위해 보냄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선포는 백성의 귀를 둔하게 하고, 눈을 감기게 하며,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사야는 거룩한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6:1, 5), 천상 회의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특권을 허락 받았지만(6:8), ‘이 백성’에게는 “‘듣기는 들어도(שִׁמְעוּ שָׁמוֹעַ)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רְאוּ רָאוֹ) 알지 못하리라”고 선포하는 사명을 받는다(6:9b). 그 결과는 이들이 돌이켜 고침을 받지 못하는 상태의 고착화다 (6:10).

6:10에서 사용된 ‘…둔하게 하고’(הַשְׁמֵן)…막히고(הַכְבֵּד)…감기게 하라(הָשַׁע)’는 동사들은 모두 히필형 명령으로, 이사야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백성을 완악하게 하시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백성을 완악하게 하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이 본문이 던지는 신학적 난제다(참조. 사 29:9-12; 63:17). 차일즈(B. Childs)가 지적하듯, 이러한 ‘신적 완악하게 함’(divine hardening)은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주제 가운데 하나로, 구약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책임을 해소되지 않은 긴장 속에 병치한다.[7]

이 본문을 둘러싼 해석은 다양한데, 크레이그 에반스(Craig A. Evans)는 이사야 6:9-10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완악하게 하여 심판을 확정하시는 선언으로 이해한다.[8] 반면, 모티어(Alec Motyer)는 이사야의 분명한 심판 선포가 반복될수록, 백성들이 그 말씀을 지속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점점 더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굳어지는 과정과 그 필연적 결과를 반영한 것이라고 본다.[9] 울리히(Ulihig) 역시 6:9b을 이사야에게 주어진 발화 명령으로, 6:10을 그 사역이 초래한 결과(effect)로 해석한다.[10] 이는 히브리어 본문과 이사야서 전체의 흐름을 함께 고려할 때, 본문의 의도를 가장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따라서, 이사야 6:9-10의 ‘완악하게 하는 사명’은 선포 그 자체의 효과라기 보다, 계시에 대한 반복적인 거부가 초래한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사야의 선포는 결국 상반된 반응을 낳는다. 소수는 경각심을 가지고 듣고 보려 하지만(사 8:16-18; 66:2), 다수는 심판과 경고 앞에서 두려워 떨기보다 조롱과 냉소로 반응한다(사 5:19). 이 점에서 이사야 6:9-10은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즉각적인 회개나 긍정적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불편한 현실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 충격적인 사명 앞에서 이사야는 이를 거절하지 않고 “어느 때까지이니이까?”라고 묻는다(6:11). 이 질문은 백성의 현실에 대한 탄식이자, 하나님의 통치가 언제까지 이러한 방식으로 지속될 것인지를 묻는 신학적 질문이다. 하나님은 나라가 황폐해질 때까지라는 응답을 주심으로써(사 6:11b-13a),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회개와 치유의 가능성을 닫고, 심판으로 진입하는 새로운 역사적 국면 속에서 이사야의 선포가 지속되어야 함을 밝히신다.[11]

심판을 통과한 남은 자와 ‘거룩한 씨’

이사야 6:9-10에 나타난 완악하게 하는 사명은 역설적으로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Missio Dei)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철저한 파괴와 황폐화는 “그루터기”를 남기고, 그 그루터기에서 ‘거룩한 씨’가 “잉태”된다(6:13b).[12] ‘거룩한 씨’를 메시아적 인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사야서 전체의 흐름 속에서 심판을 통과하며 정화된 신실한 ‘남은 자’ 공동체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이사야의 사역은 당대의 완악함을 심화 시키는 결과를 낳았지만, 바로 그 과정을 통해 형성된 ‘거룩한 씨’는 거룩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통치를 증언할 새로운 공동체의 시작점이 된다.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시작된 이사야 6장은, 결국 ‘거룩한 씨’를 남기는 하나님의 계획을 비춰주며 마무리된다. 이러한 이사야 6장의 구조는 하나님의 선교가 하나님의 거룩함과 자신의 부정함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여, 즉각적인 회복이나 가시적 성과로 완성되기보다, 심판을 통과하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이사야서 전체의 흐름에서 보듯이, 신실한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방식으로 전개됨을 보여준다 (사 57:14-19; 56:1-8; 59:9-15a).

거부가 선교의 통로가 되다

신약의 사복음서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그 불신앙의 이유를 설명하는 맥락에서 이사야 6:9-10을 인용한다(마 13:14-15; 막 4:12; 눅 8:10; 요 12:37-43). 이사야와 그의 선포가 거부되었던 것처럼, 예수님과 그의 말씀 역시 당대 유대인들에 의해 거부되었고, 그 거부는 십자가 사건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백성의 완악함과 그로 인한 거절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죽음’의 선고가 오히려 ‘생명’의 길로 전환되는 구속사적 역설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된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이사야 6:9-10을 인용하며 (행 28:27), 이스라엘의 완악함과 복음 거부가 역설적으로 이방인 선교의 길을 여는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강조한다.

이사야 6장과 신약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예언자-예수-사도-교회로 이어지는 ‘거부 속에서 진전되는 하나님의 선교’는, 즉각적인 성과나 긍정적 반응을 기준으로 선교 사역을 평가하려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재고하도록 요구한다. 완악한 거부와 실패로 보이는 사건들 속에서도, 하나님은 온 세상을 향한 자신의 구원 계획을 다른 방향으로 전개해 가신다. 이사야 6장은 선교가 인간의 전략이나 성과에 의해 규정되는 활동이 아니라, 거절과 지연, 예기치 않은 전개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임을 분명히 한다.

  1. Craig Ott, Timothy C. Tennent, and Stephen J. Strauss, Encountering Theology of Mission: Biblical Foundations, Historical Development, and Contemporary Issues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0), xv, xvii; Jerry Hwang, “The Missio Dei as an Integrative Motif in the Book of Jeremiah”, Bulletin for Biblical Research 23.4 (2013): 481-482.
  2. 크리스토퍼 라이트, 하나님 백성의 선교, (서울: IVP, 2012), 307.
  3. 홍성혁, “이사야 6장의 심판과 회복에 나타난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 구약논단 31집 (2009), 144.
  4. 크리스토퍼 라이트, 하나님의 선교 (서울:IVP, 2010), 128.
  5. Walter Brueggemann, Isaiah Vol. 1:1-39, Westminster Bible Companion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8), 59.
  6. John Goldingay, Isaiah, Understanding the Bible Commentary (Grand Rapids: Baker, 2012), 59.
  7. Childs, Isaiah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1), 56. 이런 신학적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고대 역본들은 좀더 완화된 표현을 선택했다. 칠십인역은 명령형을 미래형 직설법으로 바꾸어 백성들의 마음이 둔하게 될 것에 대한 예언으로 변화시키고, 탈굼은 백성이 ‘회개하지 않는 한’ 마음이 완악해 질 것이라는 조건부 심판이나 용서의 약속으로 변형시킨다. 사해사본 역시 완악한 백성들을 향한 확정된 심판이 아니라 경건한 자들을 향한 경고의 뉘앙스를 강화한다. 몇몇 학자들(Wildberger, Carroll 등)은 6:9-10이 이사야가 경험한 환상의 일부가 아니라 성공적이지 못한 말씀 사역이 몇 년간 지속된 후에 자신의 소명을 회고적(retrospectively)으로 되돌아 본 후 자신의 사명이 긍정적 반응을 얻지 못한 이유를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8. Craig A. Evans, To See and Not Perceive: Isaiah 6:9-10 in Early Jewish and Christian Interpretation, JSOT Supplement Series 64 (Sheffield: JSOT Press, 1989), 45.
  9. 알렉 모티어, 이사야 주석(서울: 솔로몬, 2018), 162-163.
  10. Torsten Ulihig, The Theme of Hardening in the Book of Isaiah: An Analysis of Communicative Action (Tübingen: Mohr Siebeck, 2009), 117.
  11. Ulihig, The Theme of Hardening, 117.
  12. 홍성혁, “이사야 6장의 심판과 회복”, 144,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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