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 보디올에서 만난 “형제들”(행 28:13-14)

김규섭은 행 28:14에서 바울이 만난 '형제들'을 통념과 달리 기독교인이 아닌 유대인으로 재해석한다. 이 관점은 바울의 로마행을 단순한 여정 기록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합이라는 사도행전의 핵심 신학을 요약하는 서사로 격상시키며, '디오스구로' 언급과 같은 난해 구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낸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παρεκλήθημεν)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καὶ οὕτως) 로마로 가니라(εἰς τὴν Ῥώμην ἤλθαμεν) (행 28:13-14)

멜리데(몰타)에서의 바울의 여정에 비해서, 멜리데로부터 로마로의 여행 이야기(행 28:11-15)는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을 받았다. 설교자들도 단순히 여정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 단락에서 무엇을 설교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행 28:11-15는 멜리데에서의 바울과 로마에서의 바울을 연결하는 일종의 간주곡으로 보인다.이 단락은 적어도 세 가지 측면에서 해석하기 어렵다. 첫 번째로 행 28:11에서 배의 머리 장식(디오스구로)에 대한 불필요해 보이는 묘사가 왜 등장하는지 불분명하다. 두 번째로 바울의 일행은 28:16에야 로마에 도착하기 때문에,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기술된 문장 “우리가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부정과거)”는 이해하기 어렵다. 세 번째로 이 단락의 세부적인 묘사가 사도행전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불분명해 보인다.이 짧은 글에서는 멜리데와 로마 사이의 이 간주곡이 멜리데에서의 기사와 평행을 이루면서 사도행전 전체를 요약하는 기능을 한다는 점에 주목할 것이다.

지도: 구글맵에 필자가 표시(초록색원이 수라구사, 주황색 원이 레기온, 파란색 원이 보디올)

난파된 이후 멜리데에서 후한 대접을 받은 바울은(행 28:10),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시칠리아의 수라구사(시라쿠사)에서 사흘을 머물고, 레기온(레지오 칼라브리아)에서 하루를 지낸 후, 네아폴리스(나폴리) 근교의 항구 도시인 보디올(포추올리)에 도착한다. 보디올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곡물배가 정박하는 교역의 장소로서 역할을 하였다. 로마 근교의 오스티아가 기원후 42년경 글라우디오(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서 교역항으로서 개발되면서 곡물을 교역하는 항구의 기능은 점차 보디올에서 오스티아로 이전되었지만, 바울 당대에는 보디올이 로마를 향하는 곡물 무역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바울은 보디올에서 “형제들”을 발견한다. 바울이 보디올에서 만난 “형제들”(28:14)은 구체적인 고찰 없이 만장일치로 기독교인들로 해석된다.[1]

필자는 행 28:14에서 “형제들”은 ‘기독교인들’이 아닌 ‘유대인들’이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여긴다. 첫 번째로 행 28:15에서 “형제들”을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에서 만났을 때 바울은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었다고 묘사된다. 이에 비해서 행 28:14에서 만난 형제들에 대해서는 이러한 표현이 주어지지 않는다. 바울이 안심한 것은 이후에 기독교인 형제들을 만나서이다(행 28:15). 보디올에서 만난 “형제들”이 기독교인들이었다면 이들을 만나고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졌어야 하지 않을까? 이와 같이 행 28:14에서 “형제들”은 행 28:15의 “형제들”(기독교인들)과 분명히 구분되는 뉘앙스로 기술된다.

두 번째로 사도행전의 특징 중 하나는 사도행전 저자가 유대인 이외에 이방인을 형제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점이다.[2] ‘형제’는 본래 동료 유대인들 혹은 이스라엘인들을 부르던 호칭이었다.[3] 사도행전에서 형제 호칭은 유대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유대인들도 형제라고 불리운다(행 1:16; 2:29; 2:37; 7:2; 22:1 등). 특히, 행 23:1에서 “형제들”은 분명히 유대인들이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ἄνδρες ἀδελφοί)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또한 행 28:14: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또한 행 28:21에서 “형제들”은 동료 유대인을 나타내는 민족 내부자 호칭으로 여길 수 있다: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이와 같이 사도행전에서 “형제”는 유대인들 내부에서는 동료 유대인을 지칭하는 호칭이었고 이러한 형제 호칭의 사용은 사도행전에서도 이어진다.

세 번째로 흔히 오해되는 주제이지만, 사도행전은 유대인들을 배제하지 않는다. 즉, 교회가 유대인들을 대체했다고 사도행전은 가르치지 않으며, 오히려 사도행전은 유대인들(혹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저술되었다고 여겨야 한다.[4]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에서 기독교는 여전히 유대교의 우산 아래에 있고, 유대인들은 여전히 기독교인들의 형제들이다.

네 번째로, 사도행전 28:13에서 유대인 ‘형제들’이 바울을 환대한 장면은 사도행전 2:47에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온 백성)이 교회를 환영하고, 유대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장면과 연관된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다섯 번째로 1세기에 로마의 남쪽의 캄파니아 지역에 기독교인들 혹은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했는지 불확실하다. 존 쿡(John Granger Cook)은 기원후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멸망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된 십자가 모양의 그라피티와 두 개의 유물이 기독교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여긴다.[5] 우리는 1세기에 캄파니아 지역에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했다는 문헌적, 오히려 보디올에 유대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요세푸스는 기록한다(유대전쟁사 2.7.1; 유대고대사 17.12.1).

여섯 번째로 행 28:14에서 언급된 “형제들”은 관사가 없으며(ἀδελφούς), “어떤 형제들”로 해석될 수 있다. 관사 없는 “형제들”은 행 28:15에서 관사와 함께 언급된 형제들(οἱ ἀδελφοί; 기독교인 형제들)과 구분된다. 다시 말해서 28:14에서 형제들은 보다 일반적인 개념의 형제들로 여길 수 있으며, 반드시 28:15의 형제들과 같은 실체로 여길 필요는 없다.

이러한 근거에 따라서 필자는 행 28:14의 “형제들”은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고 해석하는 것이 문맥상 보다 더 적합하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행 28:14의 “형제들”을 ‘유대인들’로 재해석하는 것이 행 28:11-15의 단락에 대한 어떠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다주는가?

우리는 행 28:14의 ‘유대인’ 형제들이 바울에게 환대를 제공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바울은 “형제들”의 청함을 받아 그들과 일주일을 함께 머물렀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환대는 멜리데에서 이방인들의 환대와 평행을 이룬다(행 28:1-10). 조슈아 지프(Joshua Jipp)가 언급했듯이 멜리데인들의 환대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멜리데인들이 야만인들이며, 그들이 미신적이며 무례하며 이성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고정관념을 전복하며, 오히려 멜리데인들은 바울과 동료들에게 손대접을 하며, 자신의 소유를 공유하는 이방인들의 모습을 통해서 멜리데인들의 인간애(philanthropia)에 초점을 둔다고 묘사한다.[6] 지프는 이러한 환대를 통해서 민족적 정체성은 유지되지만, 바울과 멜리데인들(이방인) 사이의 일종의 친족 관계가 성립한다고 여긴다.[7] 이렇듯 야만인으로 여겨지던 멜리데인들의 환대는 시돈에서 율리오와 친구들(이방인 엘리트)의 환대와 나란히 놓여진다(행 27:3).

우리는 이러한 멜리데인들의 환대(행 28:1-10)이 유대인들의 환대(행 28:14)과 나란히 놓여지면서 사도행전의 중요한 주제인 ‘일치’와 ‘화합’이라는 주제로 연결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가족은 유대인들 혹은 다른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는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손대접과 인간애에 있어서의 연대는 행 28:15에서 기독교인들의 환대와 평행된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선교의 중요한 측면이 단순히 복음 전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 화해와 연대, 배려와 존중에도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사도행전의 선교는 전도를 넘어서서 사회와 민족적 관계의 변화와 존중, 연대와 화합을 포함한다. 바울이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행 28:28)의 언급은 이방에 구원을 전하는 이스라엘의 사명이 교회를 통해서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언급이지, 이방인의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가 유대인들의 배제로 이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사도행전의 선교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손에 손을 잡고 연대를 도모한다.

디오스구로 머리 장식에 대한 언급(28:11)은 대체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서 비벌리 로버츠 거벤타(Beverly Roberts Gaventa)는 “여기에서 그들[디오스구로]에 대한 언급은 당혹스럽다”(The reference to them here is puzzling)라고 말한다.[8] 디오스구로는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들인 카스토르와 폴룩스를 지칭한다. 로마 포룸의 중심지에 디오스구로 신전이 존재했으며, 디오스구로는 당대 지중해인들에게 잘 알려진 존재들이었다. 디오스구로 머리 장식은 고대의 관점에서는 ‘보호’를 상징하는 장식이었을 것이다.[9] 다른 한편 우리는 고대인들이 디오스구로가 쌍둥이였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행 28:11에서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들에 대한 언급은 행 28:14-15에서 하나님의 두 형제들에 대한 언급과 나란히 놓여진다. 다시 말해서 행 28:11에서 디오스구로에 대한 언급은 행 28:14-15에서 두 형제들(유대인들과 유대 기독교인들)에 대한 언급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저자의 묘사는 자신의 주제에 기여할 수 있도록 충실하고 의도적으로 주어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디오스구로에 대한 묘사는 무의미하게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두 형제들’ (행 28:14-15)의 등장을 염두에 둔 것으로 여겨야 한다. 복음 전파는 유대인을 배제하고 이방인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화합과 연대 속에서 사도행전의 복음 전파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행 28:14b)라는 문장도 이해할 수 있다. 바울과 그의 일행은 아직 로마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표현은 모순적인 것으로 종종 여겨진다. 행 28:14b에서 “가니라”는 부정 과거(아오리스트) 동사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마치 바울이 행 28:14에서 로마에 도착한 듯한 인상을 준다. 필자는 행 28:14에서 “가니라”(ἤλθαμεν)의 부정과거형은 헬라어 동사 시상의 관점에서 동작을 ‘요약’하는 기능을 부호화한다고 여긴다.[10] 다시 말해서 행 28:14에서 “로마로 가니라”의 언급은 로마로 들어가고 있는 바울의 동작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로 들어가는 바울의 여정을 요약하는 진술으로 우리는 여겨야 한다.[11] 그렇다면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는 언급(행 28:14b)에서 방점이 찍히는 것은 바울이 로마로 향하는 방식이다(“이와 같이”). 바울은 로마로 어떻게 가는가? 바울은 유대인들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손대접을 받으면서 (행 28:14a) 로마로 향한다. 그리고 디오스구로의 장식이 된 배를 타고 이방인과 유대인의 화합을 도모하면서 로마로 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는 언급은 단순히 바울이 로마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문장이 아니라(이 사실은 16절에서 전달된다), 바울이 로마를 향하는 방식을 요약한 문장으로 여길 수 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행 28:11-15의 기능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 단락은 멜리데에서의 여정과 로마에서의 여정 사이에 존재한다. 멜리데에서의 환대(행 28:1-10)와 동료 기독교인들의 환대(행 28:15) 사이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환대를 받는다(행 28:13-14). 이것은 바울의 선교가 누군가를 배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민족 간의 화해와 연대를 이루는 방식과 환대와 배려를 추구하는 방식으로 추구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사도행전이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통해서 열방을 치유하는 내러티브’로 바라보아야 한다.[12] 바울이 로마로 향하는 여정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의 화합을 도모하는 여정이기도 했다. 필자는 기독교가 사회적으로 기여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복음을 ‘배제의 내러티브’로 잘못 읽고, 1세기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회적 상상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종종 개인적 적용을 위해서 읽는다. 개인적인 해석은 분명히 도움되는 지점이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공동체적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유념할 필요가 있다. 행 28:13-14에서 보디올에서의 “형제들”을 만난 바울의 여정의 이야기가 사도행전이 전달하는 사회적 상상력의 관점에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메시지는 인간애(philanthropia)였다. 이러한 인간애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민족적 경계를 넘어, 민족적 경계를 존중하면서 주어진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1] 예를 들어,Craig S. Keener, An Exegetical Commentary vol. 4: Acts 24:1-28:31 (GrandRapids: Baker, 2015), 3703; TroyM. Troftgruben, A Conclusion Unhindered: A Study of the Ending of Acts withinits Literary Environment (WUNT II/280; Tübingen: Mohr Siebeck, 2010), 117.

[2] 참조. C.K. Barrett, A Critical andExegetical Commentary on the Acts of the Apostles (Edinburgh: T&TClark, 1994), 146.

[3] 그렇다면 유대인 서신 저자인 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이방인 수신자들을 형제라고 부르는것은 의미 심장하다. 우리가 아는 한 유대인들이 서신에서 이방인들을 형제라고 호칭하는 경우는 드물다. 김규섭은 ‘형제’ 호칭의사용이 아브라함의가족의 구성원의자격을 이방인에게확장되는 것을 나타낸다고 여긴다. Kyu Seop Kim,“Reframing Paul’s Sibling Language in Light of Jewish Epistolary Forms ofAddress,” HTS Teologiese Studies/Theological Studies 71, no. 1 (2015):Art. #2860, 8 pages. 반면, 루츠도어링(Lutz Doering)은 ‘형제 호칭’이 유대서신에서 동료 아브라함의 자손을 지칭한다고여긴다. Lutz Doering, AncientJewish Letters and the Beginnings of Christian Epistolography (WUNT 298;Tübingen: Mohr Siebeck, 2012).

[4] 이 주제는 다른지면에서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5] 다음의 논문을참조하라. John Granger Cook,“Alleged Christian Crosses in Herculaneum and Pompeii,” Vigiliae Christianae73 (2009): 271-296.

[6] Joshua W. Jipp, “Hospitable Barbarians in Acts 28:1–10,” Journal ofTheological Studies 68 (2017): 23-45 [42].

[7] Jipp,“Hospitable Barbarians,” 38.

[8] 예를 들어, Beverly RobertsGaventa, The Acts of the Apostles (Abingdon New TestamentCommentaries; Nashville: Abingdon Press, 2003), 360.

[9] Carl Holladay, Acts:A Commentary (New Testament Librar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Knox, 2016), 504.

[10] 콘스탄틴 캠벨(Constantine R.Campbell)은 내러티브에서 부정과거가 요약의 형태로 동작을 묘사한다고 말한다. Constantine R.Campbell, Basics of Verbal Aspect in Biblical Greek (Grand Rapids:Zondervan, 2008), 38.

[11] “로마에 도착하고 있는 동작”을 전달하려면 완료 시제(근접, 미완료,지속 시상)가 보다 적합할수 있다.히12:22에서 “시온산에 도착했다”[προσεληλύθατε Σιὼν ὄρει]는것을 표현할 때 완료 시제가 사용된다.

[12] 이 표현은 다음의 글에서 온 것이다. Jipp,“Hospitable Barbarians,”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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