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다양한 문학적 장치와 신학적 모티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출애굽은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적인 구원 패러다임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경험일 뿐 아니라 미래 구원의 예표이자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선교적 목적을 담고 있는 중요한 모티프이다.[1] 이러한 출애굽 모티프는 이사야 40-55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사야 40-55장의 역사적 배경은 바벨론 포로기이다. 이사야는 그들의 조상이 ‘종 되었던 집’ 애굽에서 나왔던 것처럼,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도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고토로 돌아오게 될 것을 예언한다. 이 ‘새 출애굽’은 모세의 인도를 따라 이루어진 첫 번째 출애굽 내러티브의 패턴인 ‘애굽을 떠남-광야 여정-약속의 땅 진입’을 바탕으로 하되, 이를 연상시키는 주제어와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묘사된다.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킨 여호와는 홍해를 가르고 물을 말려서 길을 내고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가게 하셨고, 그들을 광야 40년 동안 먹이고 보호하시며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록 인도하셨다.
새 출애굽 때에도 여호와는 홍해를 말리고 길을 내셨던 동일한 능력(사 43:2; 44:27; 51:9-10)으로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사(사 43:14-21; 48:20-22; 52:10-12; 55:12-13), 변화된 광야로 난 길을 안전하게 지나서(사 40:3-5; 41:17-20; 42:14-16; 43:14-21) 시온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사 49:9-13). 선지자는 이러한 새 출애굽 메시지를 통하여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고, 여호와를 신뢰하며 그의 구원을 기다리도록 격려한다.
윌리엄 반 게메렌은 첫 번째 출애굽과 이사야서에 나타난 새 출애굽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2]:

위와 같이 첫 번째 출애굽의 패턴을 따르지만 질적으로 다른 새 출애굽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본문이 이사야 43:14-21이다. 이사야 39:6-7이후로 처음 바벨론을 언급하는 이 본문은 바벨론으로부터의 구속과 바벨론의 몰락을 약속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의 자기 계시: 창조자, 구속자, 왕, 용사
이사야 43:14-15
14a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
14b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에게 자기들이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3]
15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이사야 43:14-15절의 구조를 보면 바벨론으로부터의 새 출애굽을 언급하는 43:14b절이 14a절과 15절에 둘러 싸여 있다. 이는 새 출애굽의 메시지가 여호와의 자기 계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반복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קְדוֹשׁ יִשְׂרָאֵל)라고 부르는 것은 이사야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다. 이 독특한 호칭은 이사야 6장에 기록된 선지자 이사야의 소명 기사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출애굽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다름 아닌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다.
그 여호와는 이사야 40-55장에서 반복적으로 자신의 성품과 능력,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상기 시키며 바벨론으로부터의 새 출애굽을 약속하신다. 그분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여호와’(יְהוָה)시다(출 3:14).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시며, 이스라엘의 ‘구속자’(גֹּאַלְכֶם), ‘창조자’(בּוֹרֵא יִשְׂרָאֵל), ‘왕’(מַלְכְּכֶם)이시다. 이러한 여호와에 대한 집약적 계시는 “구약 신학의 미니어처”와 같다고 할 만큼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행하시는 여호와의 속성을 잘 드러낸다.[4] 거룩하신 여호와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 또한 거룩하게 살도록 부르셨으나 그들은 실패하였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한 민족으로 ‘창조’하셨고, 그들의 구속자가 되셔서 애굽 왕 바로의 압제에서 구원하셨고, 그들의 왕이 되셔서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그들의 순종과 충성을 기대하셨다.
비록 이스라엘은 언약을 깨뜨리고 불순종하고 반역했지만, 여호와는 그의 성품과 구원 계획을 따라 바벨론에서 그들을 구해 낼 것을 말씀하신다.
이사야 43:16-17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이사야 40-55장에서 여호와가 행하시는 구원은 그분의 창조자 되심과 분리될 수 없다. 이사야 43:16-17은 홍해 사건을 간결하고 강렬하게 묘사한다(출 14:23; 15:21). 애굽 군대의 추격으로 궁지에 몰렸던 이스라엘 앞에서 여호와는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로 건너가게 하셨지만, 그들을 뒤쫓던 애굽의 군대와 병거는 수장시키셨다. 바람으로 바다를 가르고 마른 땅이 드러나게 하며, 그 바닷물이 당대 최고의 군대와 마병을 삼키도록 하여 애굽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주시는 것은 창조주만 가능한 구원의 역사다 (참조. 마 8:23-27; 막 4:41).
16-17절의 히브리어 원문은 각각 16절에서 말씀하시는 ‘여호와’를 설명하는 분사를 첫 머리에 놓고 있다: הַנּוֹתֵן (하노텐) (16a절), הַמּוֹצִיא (하모찌)(17a절). ‘주다’ 동사의 분사에 정관사를 붙여서(하노텐) 여호와는 바다에 길을, 큰 물 가운데 길을 베푸시는 분이시며, ‘나가다’ 동사의 히필형 분사에 정관사를 붙여서(하모찌) 여호와는 애굽의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큰 물에 수장시켜 일어날 수 없도록 첫 번째 출애굽에서 역사하셨던 분이심을 강조한다. ‘용사’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지 않지만 애굽의 강한 군대를 몰살시킨 ‘용사’ 여호와를 묘사하는 구절이다. 16-17절의 분사의 사용은 과거의 사건을 생생하게 전달할 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언제든지 그렇게 행하실 수 있는 여호와의 구속의 능력을 나타낸다. 여호와의 능력으로 애굽의 군대가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함은 미완료형 동사를, ‘소멸하다’, ‘꺼지다’는 완료형 동사를 사용하여 여호와가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일을 현장감 있게 묘사하는 동시에 완전한 승리를 표현한다.[5] 출애굽은 과거의 기억에만 머무르는 사건이 아니라 이사야의 예언을 듣는 세대의 눈 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현재적 사건이자 완벽한 구원을 행하신 여호와의 살아 역사하심을 기대하도록 한다. 이렇게 16-17절은 사건 자체보다 이러한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가 어떠한 분이신지를 상기시키는 데 더 강조점이 있다. 바로 그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18-21절에 기록된 새 출애굽이다.
‘새 일’: 창조자의 창조적인 구원 방법
이사야 43: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새 일’, 새 출애굽은 위의 표에서 정리한 것과 같이 첫 번째 출애굽을 뛰어넘는 완전히 다른 차원, 다른 방법으로 펼쳐질 것이다. 첫 출애굽에서 이미 놀라운 일을 행하셨고, 그 사건은 이후 여호와가 행하시는 구원의 원형이 되었다.
그런 놀라운 사건을 16-17절에서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하며 상기시킨 후에, 이를 지나간 ‘이전 일’(רִאשֹׁנוֹת), ‘옛날 일’(קַדְמֹנִיּוֹת)이니 기억하거나 깊이 생각지 말라고 하신다(사 41:22; 42:9; 43:9;46:9; 48:3). 그만큼 여호와는 전혀 새로운 구원 계획을 준비하고 계신다. ‘행하다/만들다’는 히브리어 동사도 분사 형태(עֹשֶׂה)로 사용해 현재 진행형의 역동적 생생함과 임박성을 표현한다. ‘이제 나타낼 것이라’(개역개정)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는 ‘싹이 돋아난다’(תִצְמָח)는 뜻으로 포로 된 백성들의 눈 앞에 이제 곧 갑작스럽고도 새로운 일이 펼쳐지게 될 것임을 전달한다.
창조자 여호와는 매번 같은 방법이 아니라 때로는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구속하신다.[6] 이방인 방 고레스를 사용한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사 44:27-45:8)과 ‘고난 받는 종’(사 52:13-53:12)을 통한 속죄와 구속은 누구도 결코 생각해 보지 못한 구원의 방식이다.
이사야 43:19에서 첫 번째 출애굽과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길’(דֶּרֶךְ)이 베풀어진 장소다. 첫 번째 출애굽에서는 ‘바다 가운데,’ ‘큰 물 가운데’ 길(נְתִיבָה 네티바)이 있었다면(16절), 새 출애굽 때에는 마른 땅인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נְהָרוֹת 네하로트)(19-20절)이 생기는 것이다. 첫 번째 출애굽에서 많은 물이 죽음과 혼돈을 초래했다면, 새 출애굽에서 여호와께서 광야에서 공급하시는 물은 여호와의 택한 백성 뿐 아니라 들짐승까지도 마시며 기뻐하는 생명의 근원이 될 것이다. 첫 번째 출애굽에서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반역과 시험으로 점철되었지만, 바벨론에서 나와서 광야를 지나 시온으로 돌아가는 새 출애굽의 과정은 여호와의 공급과 보호가 있는 안전한 여정이 될 것이다. 광야에 베풀어진 길과 물은 첫 번째 출애굽을 뛰어 넘는 구원의 이미지이며, 바벨론에서 이스라엘로 이어지는 시리안 광야 길을 넘어 광야의 변화로 인해 동물까지 여호와를 찬양하게 되는 낙원의 모습, 곧 종말론적인 ‘새 창조’(new creation)까지 바라보게 한다.
증인들: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역할의 회복
이사야 43: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새 출애굽의 목적은 여호와의 백성의 회복에 있다. 20절 마지막 행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백성”, “내가 택한 자(בְחִירִי)”라고 부르신다. 이 표현은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를 기초로 한 표현이다(신 7:6-7; 14:2; 사 41:8-9; 43:10).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은 이 언약을 깨뜨리고 우상을 섬기고, 죄에 빠져 언약적 심판을 받아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여전히 “내 백성”, “내가 택한 자”라고 부르신다.
새 출애굽 본문의 바로 앞 문맥인 43:10에서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בָּחָרְתִּי)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와가 창조하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종’으로 열방 앞에 여호와의 증인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오랜 시간의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그들이 섬겼던 우상들과 같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맹인이겠느냐”(사 42:19) 그들은 결국 심판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고, 그들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이 수치를 당했다 (사 52:5; 겔 36:20-23; cf. 렘 34:16; 암 2:7).
여호와는 이런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회복시키려고 하신다. 21절의 “지었다”는 동사 ‘야짜르’(יצר)는 토기장이가 도자기를 빚는 행위를 뜻한다. 토기장이인 여호와는 이 깨지고 쓸모 없는 그릇을 내버리지 않고, 섬세한 손길로 다시 빚어 원래의 의도대로 사용하실 계획이다. 여호와는 새 출애굽을 통해 그들을 창조한 본래 목적인 “나의 찬양”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 행하신다.
흥미롭게도 “이 백성”( עַם־זוּ암-주)이라는 표현은 이 본문 외에 출애굽기 15장에서만 두 번 사용된다[7]: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출 15:13), “주께서 사신 백성”(출 15:16). 이사야 43:16-17절의 간략한 홍해 사건 묘사와 더불어 홍해를 건넌 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불렀던 ‘바다의 노래’ (출 15장)와의 연결성은 이사야 43:14-21이 첫 번째 출애굽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확증해 줄 뿐만 아니라, 첫 출애굽이나 새 출애굽의 궁극적 목적은 동일하게 여호와의 백성으로써 시온에서 여호와를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임을 보여준다. 첫 번째 출애굽의 종착점이 “주의 거룩한 처소” 시온에서 여호와를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었던 것처럼(출 15:13), 여호와는 새 출애굽을 통해 바벨론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어 고토로, 시온으로 돌려보내어 이스라엘이 여호와가 행하시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여 알며 민족들 앞에서 여호와의 증인으로써 여호와를 찬양하도록 하기위해 일하신다.
결론: 선교적 의미와 현대적 적용
첫 번째 출애굽에서 여호와는 ‘나는 여호와를 모른다’고 했던 바로와 고된 노동 가운데 여호와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고 여호와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이스라엘에게 열 가지 재앙과 홍해 사건을 통해 자신을 알리셨다. 바벨론으로부터의 새 출애굽에서도 여호와는 분명한 자기 계시를 따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창조자, 구속자, 왕, 토기장이- 놀랍고 새로운 방법으로 일하시므로 자신의 통치와 주권을 천명하신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자신을 알리시는 선교하시는 분이시다.
오늘날 교회는 여호와의 자기 계시를 비웃으며 무시하는 바벨론과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선교적 본성과 자신들의 선교적 정체성을 인식하고, 현재 우리 가운데 새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을 기억하며, 한국 교회의 과거의 영광에 머무르지 않고 ‘새 일’을 기대하므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할 방법을 모색해야 할 때이다.
[1] 장세훈, “성경신학적 출애굽 이해와 세례,” 『구약논집』제 2 집(2006), 158; R. E. Watts, “Exodus Imagery,” Dictionary of the Old Testament: Prophets (Downers Grove, IL; Nottingham, England: IVP Academic; Inter-Varsity Press, 2012), 206.
[2] Willem A. VanGemeren, “Window 8: New Exodus, ” Lecture Note of Isaiah (Trinity International University, 2013). 최윤갑, 구속사로 읽는 이사야 (서울: 새물결플러스, 2020), 227 에서 재인용.
[3] 14b절은 히브리어 본문의 모호함과 사본들(LXX, Targum, Vulgate)과의 차이점 때문에 학자들이 약간의 수정을 거쳐 다양하게 번역하기도 한다: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보내어 모든 빗장을 부술 것이다. 갈대아인들의 외침은 애가로 변하게 될 것이다” (Childs, JPS, NRSV);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으로 보내어 그들을 모두 도망자로 내려가게 것이다. 심지어 갈대아인들도 …배로 보낼 것이다”(Oswalt, ESV, NIV, NASB). 차일즈처럼 ‘배로’(보오니욧)를 ‘애가로’(바아니욧) 수정하기도 하고, ‘배를’ 그대로 유지할 경우 이 배의 묘사에 대한 의견도 달라진다. 외침을 긍정적으로 해석하여 기쁨이나 자랑으로 해석하는 반면, 오스왈트는 도망자들을 실어나르기 위해 ‘기다리는’ 배로 번역하기도 한다. 어떻게 번역하든 이 절이 바벨론의 폐망을 의미함에는 이견이 없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바벨론으로 ‘누구’를 보내는지 보내는 대상이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비교-개역개정: 사람들) 이사야 40-48의 문맥으로 볼 때 장차 소개될 고레스를 보내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사 44:23-28; 45:1-8).
[4] John Oswalt, The Book of Isaiah Chapters40-66, NICOT (Grand Rapids: Eerdmans, 1998), 153.
[5] 알렉 모티어, 이사야 주석, 742.
[6] 이사야 적용주석, 582.
[7] Shalom M. Paul, Isaiah 40-66, Eerdmans Critical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2012), 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