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바울의 여정을 '그리스도처럼 됨'의 측면에서 바라볼 것이다. 사도행전 28:1-15에서의 바울 묘사의 초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 멜리데(몰타)에서 보디올에 이르는 바울의 여정과 그에 대한 묘사가 산만해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해석자들은 바울이 로마에서 무죄하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여기는 한편 , 어떤 다른 이들은 사도행전 저자가 바울을 일종의 초인간으로 묘사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연구자들은 이 단락에서 환대의 중요성을 관찰하였다. 필자는 다른 지면에서 행 28:1-10에서 멜리데에서 바울의 여정이 '환대'라는 측면에서 행 28:13, 14에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연대로 연결된다는 것을 논의한 바 있다(필자의 글 "우리가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 보디올에서 만난 '형제들'(행 28:13-14)"을 보라). 그렇다면 행 28:1-15에 이르는 바울의 여정은 '환대', '형제애', '인간애'라는 측면에서 통일성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지면에서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본 단락(행 28:1-10)의 의미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이 단락은 사도행전을 관통하는 주제인 "그리스도와 같이 됨"이라는 측면과 직접 연결되기 때문이다.[1] 이것을 생각해보기 위해서 사도행전 전체의 맥락을 먼저 조망해보고자 한다.
먼저 "그리스도와 같이 됨"이 "신격화"라는 개념과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자기 신격화"는 사도행전에서 분명히 발견되는 주제이며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사도행전의 저자("누가")는 자신을 신적 존재로 간주하려고 시도하는 두 명의 인물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첫 번째는 사도행전 8장에 등장하는 시몬 마구스이고 , 두 번째는 사도행전 12장에서 묘사되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이다. 시몬 마구스는 "하나님의 큰 능력"(8:10)이라고 불리웠다(ἡ δύναμις τοῦ θεοῦ ἡ καλουμένη μεγάλη). 이러한 호칭은 고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신격화'와 관련이 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시몬 마구스가 단순한 마술사가 아니라 기적을 행하면서 사도들과 대조되는 인물로 묘사한다. 그러나 시몬 마구스의 '신격화'에 대한 갈망은 빌립을 만나면서 좌절된다. 빌립은 "표적과 큰 능력(δυνάμεις μεγάλας)"(8:13)을 나타냈고 , 자신을 능가하는 빌립의 큰 능력에 시몬도 놀란다. 시몬은 빌립으로부터 성령의 능력을 돈으로 사고자 시도한다(8:18-19). 그러나 빌립은 이렇게 성령의 능력을 돈으로 사고파는 것을 거절하면서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라고 시몬에게 선언한다. 특히 사도행전 8:23은 고대의 '묶는 저주'(binding curse; κατάδεσμος)의 형식을 연상시킨다.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σύνδεσμον ἀδικίας)". 이와 같이 사도행전 8:23에서 베드로는 시몬이 이미 저주를 받은 사람인 것으로 나타낸다(ὁρῶ σε ὄντα; 나는 네가...인 것을 본다). 그렇다면 시몬 마구스는 자신을 신격화하려고 했지만, 이와 반대로 '저주받은 자'로 묘사된다. 이렇듯 사도행전은 '자기 신격화'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며, 자신을 신으로 혹은 신과 같이 내세우려는 자는 정반대로 신적 심판을 받는 것으로 묘사한다.
'자기 신격화'의 두 번째 모델은 헤롯 아그립바 1세이다. 헤롯 왕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투옥시킨다(행 12:1-19). 그 이후에 두로와 시돈과의 화해를 청함을 받고 왕복을 입고 단상에 서서 백성 앞에서 연설을 한다(12:20-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 12:21-23).
연설하는 통치자를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묘사하는 것은 고대의 통치자가 신격화되는 과정을 연상시킨다. 자신의 위대성에 도취된 헤롯은("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므로") 즉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는다("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사도행전의 저자는 헤롯의 죽음이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것과 연관된다고 묘사한다. 다시 말해서 헤롯은 자신을 신격화하려고 한 것에 대한 대가로 하나님으로부터 즉각적인 심판을 받는다. 이렇듯 헤롯이 자신을 신격화하려고 한 행위는 그리스 문학과 역사 기술에 자주 암시되는 개념인 휘브리스(오만, ϋβρις)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잊고, 신의 경계를 침범하려는 시도(즉, 휘브리스)는 신의 심판(네메시스, νέμεσις)을 초래한다. 이렇듯 사도행전의 저자는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면서 인간의 한계와 연약함을 상기시킨다.
반대로 사도행전에서는 '신격화'를 거절한 이들이 묘사된다. 신격화를 거절한 첫 번째 모델은 사도행전 10장에서의 베드로이다. 욥바에서 머물던 베드로가 고넬료의 청을 받고 가이사랴에 도착했을 때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절을 한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신과 같이 자신을 대접하는 고넬료의 대접을 거절한다: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행 10:26). 권력자를 신적 존재로 여기는 것은 고대에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고 고넬료는 이와 같이 베드로를 대접하고자 했지만 베드로는 단호히 거절한다.
신격화를 거절한 두 번째 모델은 사도행전 14장에서의 바울과 바나바이다.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병자를 치유하자(행 14:8-18)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헤르메스와 제우스라고 부른다(14:12).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등장을 일종의 신적 방문(θεοξενία)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헤르메스와 제우스라고 불리우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행14:13-15).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인간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경배를 받으셔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와 같이 사도행전은 하나님께서만이 경배를 받으실 분이시며,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경계선을 분명히 긋는다.
이러한 것을 전제로 하면서 우리는 사도행전 28:1-10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조망할 수 있다. 조난당한 바울이 멜리데에서 불을 피웠을 때 다음과 같은 일이 발생한다: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행28:3-6).
바울이 독사에게 물렸지만, 죽음을 당하지 않는 것을 보고 멜리데의 원주민들은 바울을 "신"으로 인식한다(28:6). 멜리데 사람들은 왜 바울을 신으로 인식했을까? 첫 번째로 고대의 문화에서 뱀에게 물렸지만 죽지 않는 것을 신적 보호 혹은 신성한 존재와 연관된 것을 믿는 믿음이 존재했다. 두 번째로 바울은 뱀에 물렸음에도 평정심을 나타내며, 이러한 초월적 평정심을 신적 존재의 특징으로 고대인들은 이해했다. 세 번째로 특정 인물이 위험과 고난을 극복하고 신적 보호를 경험한 이후 신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존재했다. 네 번째로 바울은 멜리데의 높은 사람 보블리오의 부친을 치유한다(행 28:7-8).
데이비드 리트와(David Litwa)는 멜리데에서의 바울 이야기와 그리스 신화에서의 필록테테스(Philoctetes) 이야기를 비교한다.[2] 무죄한 이가 야만인들이 사는 외딴 섬에서 독사에 물렸음에도 해를 입지 않았다는 점에서 바울과 필록테테스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아마도 고대인들은 멜리데에서의 바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당대에 잘 알려진 필록테테스의 이야기를 떠올렸을 수 있다.
그러나 바울과 필록테테스의 이야기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도 존재한다. 첫 번째로 필록테테스는 독사에 물렸을 때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지만 바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독사를 불에 던진다. 두 번째로 필록테테스는 외딴 섬(렘노스섬)에서 혼자서 고통을 참아내야 했고 "야만인들"과 교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당대에 "야만인들"(βάρβαροι; 행 28:2, 4)이라고 불리웠던 멜리데 사람들과 교제와 연대를 한다. 게다가 바울은 필록테테스와 달리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역할을 담당한다.[3] 이와 같이 바울의 이야기는 역사적 진정성이 있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필록테테스의 이야기를 연상시키고 또 하나 필록테테스를 바울이 능가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전달할 것이다.
이렇듯 바울이 신적 보호를 받고 있고 신적 능력을 나타낸 것으로 멜리데인들은 인식할 수 있었고 이와 같이 바울을 신적 존재로 여겼을 수 있다. 사도행전 14장에서 바울은 분명히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시도를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자신이 인간적 한계를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바울은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고 신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거절했다. 그러나 행 28:1-10에서 바울의 패턴은 그가 '그리스도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을 나타낸다. 행 28:6에서 바울을 "신"이라고 말한 멜리데인들의 언급은 그들이 바울을 신으로 오인한 것을 나타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바울이 신적 방문의 대행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잘 알려진 것처럼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의 패턴(눅 9:51-19:28)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의 패턴과 오버랩된다. 바울은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멜리데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나타내는 바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종종 우리는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으로 이해하고 사도행전에서 '성령 충만'하여 '능력'을 발휘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도행전 해석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능력'이라는 것을 종종 오해할 때가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행 28:1-10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 본문을 해석할 때 바울의 초월적인 능력에 집중하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능력에 대한 묘사가 주어지기 이전에 사도행전의 저자는 시몬 마구스(행 8장)와 헤롯 왕(12장)의 이야기를 통하여 자기를 신격화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을, 그리고 베드로(행 10장)와 바울, 바나바(14장)를 통해서 자기 신격화를 거절한 사람들에 대한 모습을 묘사하였다. '신격화'는 스스로 신이 되려는 인간의 시도이지만, '그리스도처럼 되어감'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령의 변화로 이루어진다.
사도행전에서 능력은 단순히 개인적인 능력이 아니라 공동체를 세우는 것과 연관된다.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의 능력은 자기를 높이거나, 자기를 자랑하거나,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같은 초월적 평정심과 능력 그리고 동정심을 나타낸다. 이러한 능력은 이 능력을 통해서 자신을 세우려는 자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려는 자들에게 나타난다. 멜리데인들이 바울과 그 일행에게 베푸는 특별한 친절과 동정과 환대를 통해서 환대가 새로운 가족 관계로 연결된다.[4] 다시 말해서 멜리데인들과 바울의 관계는 상호적인 것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거나 그리스도를 대행하지만 바울이 이것을 통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멜리데에서 손님이었고 조난당한 자였고 또한 도움이 필요한 자이기도 했다. 멜리데인들이 바울을 필요로 하는 만큼 바울도 멜리데인들이 필요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능력을 '상하 관계'를 만들기 위하여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바울은 자신을 따르게 만들기 위하여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바울이 그리스도와 같은 능력을 나타냈을지라도 멜리데인들과의 관계는 여전히 상호적이며, 그의 능력은 멜리데인들과의 일종의 가족 관계를 형성하는 데 사용이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한다. 능력을 보이고 싶고, 다른 사람들에게 특별한 존재로 기억되길 원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이 욕망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때, 큰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전한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아마도 당대의 카리스마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를 전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종종 자신의 초월적 능력이나 치유의 은사를 나타내고 싶어하는 이들을 우리는 본다. 혹은 자신의 뛰어난 언변이나 설교 실력을 자랑하려고 할 수도 있다. 슬프게도 우리는 '자기애'에 빠진 지도자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가? '자기애'에 빠진 지도자들은 양들을 아끼지 않고 자신을 위하여 양들을 이용한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추종하게 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능력을 발휘하면 능력을 발휘하는 자와 능력이 없는 자 사이의 상하 관계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권능은 공동체와 관계 그리고 연대를 창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능력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혹은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사용될 때 그 능력은 교회를 파괴한다. 능력이 상하 관계를 만드는 도구가 아니라, 서로를 섬기고 치유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변화될 때 우리에게 능력이 주어질지도 모른다. 그 능력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 본 글의 논의는 다음의 단행본의 논의에 빚진 바 있다. Daniel B. Glover, Patterns of Deification in the Acts of the Apostles (Wissenschaftliche Untersuchungen zum Neuen Testament II/576; Tübingen: Mohr Siebeck, 2022). 글로버는 '신화'(deification)를 '신화'와 '자기 신격화'(self-deification)으로 구분한다. 필자는 문맥에 따라 '신화'(deification)를 둘로 구분하고자 한다: 1) 그리스도와 같이 됨(Christosis); 2) 자기 신격화(self-deification).
[2] M. David Litwa, "Paul the 'god' in Acts 28: A Comparison with Philoctetes,"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136 (2017): 707-726.
[3] 리트와는 유용하게 Litwa, "Paul the 'god' in Acts 28," 716에서 바울과 필로테테스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요약한다.
[4] 예를 들어서 다음을 보라. Joshua W. Jipp, "Hospitable Barbarians: Luke's Ethnic Reasoning in Acts 28:1-10,"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68 (2017): 23-45; Joshua W. Jipp, Divine Visitations and Hospitality to Strangers in Luke-Acts: An Interpretation of the Malta Episode in Acts 28:1-10 (Novum Testamentum Supplements 153; Leiden: Brill,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