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행 13:13-14, 개역개정).
이 글은 사도행전 13:13-14을 해석하면서 사도행전 저자의 전체적 서사적 전략 속에서 사도행전의 지리적 묘사가 무엇을 암시하는지 검토할 것이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행 13:13-14, 개역개정).
우리는 사도행전을 읽을 때 고대 지중해의 지리적 환경을 이해한다면 사도행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다. 마크 윌슨에 의하면 바울은 1차 선교 여행에서 버가를 떠나서 클리막스 산-콤마마-아폴로니아를 거쳐서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높다.[1] 바울이 사도행전 13:13-14에서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배를 이용한 해양 선교에서 도보를 통한 내륙 선교로 선교 방식을 변경한 것을 나타낸다.
비시디아 안디옥으로의 내륙 여정은 적어도 해양 선교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적어도 세 가지의 어려움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첫번째로 1세기 소아시아 내륙 지역(특히 타우루스 산맥과 그 북쪽 평원)에는 악명 높은 길리기아 산적들이 존재했다. 바울은 길리기아 속주 출신이기 때문에 소아시아 내륙의 빈약한 치안에 대한 상황에 대한 정보가 없었을 가능성은 적다. 이러한 이유(길리기아 산적)로 로마의 지배력이 비교적 잘 유지된 도로를 따라서 여행하는 것을 바울은 선호했을 것이다. 따라서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는 로마의 도로인 비아 세바스테(황제의 길, via sebaste)를 바울이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비아 세바스테는 기원전 6년경 로마의 소아시아 지배를 확립하기 위해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건설했으며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남북으로,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를 동서로 잇는 도로이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에서 소아시아 내륙 여정에 대해서 기록된 바에 따르면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를 여행하는데, 이 도시들이 바로 '비아 세바스테'의 도상에 위치한 폴리스들이다.

두 번째로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는 바울의 여정을 읽을 때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이 얼마나 먼 곳인지 인식하지 못할 때가 있다. 바울은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은 비아 세바스테를 기준으로 약 251킬로미터 가량이다.[2] 이 거리는 도보로 10일 가량 걸리는 거리였을 것이다.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기 위해서 강을 따라 이용할 수 있는 배편은 존재하지 않았다.[3] 따라서 바울이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기 위해서는 도보 혹은 수레를 이용해야만 했을 것이다.
세번째로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기 위해서는 산악 지형을 통과해야 했다. 특히 우리는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갈 때 타우루스 산맥이 놓여져 있다는 것을 잊을 수도 있다.

버가 근교에서 북쪽을 바라보았을 때 바울은 위와 같이 험준한 산악 지형(타우루스 산맥)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타우루스 산맥과 그 산맥을 근거지로 하는 길리기아 산적의 존재를 고려할 때 바울이 저 산맥을 넘어서 비시디아 안디옥에 가자고 했을 때 집에 돌아가겠다고 한 마가의 결정이 이해가 안되는 것이 아니다. 다행히 비아 세바스테는 저 험준한 산악 지형을 우회하여 비교적 낮은 협곡을 따라 클리막스(Κλῖμαξ) 고개라는 지역을 통해서 연결된다. 필자는 도보로 클리막스 고개를 직접 넘어 본 적이 있다.[4] 클리막스 협곡의 아래(남쪽)에는 막시미아누폴리스라는 마을이 존재했고, 여관(mansio)도 발견된다. 하지만 고개 남쪽 마을의 유적들은 대개 기원후 2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클리막스 고개의 정상에는 로마의 마을의 유적이 존재하는데, 근처에서 발견된 비문들의 연대로 판단하건대 이 마을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재위: 기원후 69-79년) 시기에 혹은 그 이후에 건립된 마을일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클리막스 고개를 통해서 타우루스 산맥을 넘을 때 바울을 지켜줄 로마의 공권력은 아직 희박했을 가능성이 높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이후 클리막스 고개는 황실의 영지로 개발되면서 로마의 지배력이 공고해진다. 바울이 이 지역을 지나던 시기는 아직 소아시아 내륙에서 로마의 지배력이 공고하지 않던 시기였다. 클리막스 고개를 공중에서 촬영하면 아래와 같다.


이와 같이 바울은 내륙 선교를 위해서 삼중의 어려움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1) 산적으로 인한 어려움; 2) 먼 거리; 3) 산악 지형의 통과.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내륙 선교를 위해서 겪었을 어려움에 대해서 사도행전은 거의 기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마가(요한)가 바울의 선교팀을 버가에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언급을 통해서 험난했을 바울의 내륙 선교의 여정을 암시할 뿐이다.
바울의 선교의 여정의 어려움을 생략한 것은 선택과 집중에 대한 고대 역사 기술 방식으로 말미암는다. 고대의 역사 기술은 가능한 상세하게 모든 정보들을 묘사하는 것보다 저자가 집중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한 서술에 제한하여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고대 그리스 역사 기술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와 관련이 적은 세부 사항을 생략하는 경우들이 종종 발견된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 기술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드라마적, 수사적 요소를 도입한다는 점에서 사실 기술을 추구하는 근대적 역사 기술의 장르와 차이가 있다.[5] 고대의 역사 기술은 오히려 역사에서 발견되는 보편적, 반복적 패턴을 제시하고 공동체의 현재를 이러한 관점에서 되돌아보게 하며, 공동체의 미래를 예측 가능하게 만들려는 목적이 있다. 우리는 사도해전에서 저자가 가능한 모든 세부 사항을 나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만약 비아 세바스테를 통한 소아시아 내륙 선교의 여정에서 바울 선교팀이 경험한 고단함과 어려움을 상세하게 묘사했다면 그것을 통해 저자가 강조하고자 했을 주제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서사적 전략을 채택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이것은 사도행전의 전체적인 서사 전략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
사도행전은 루스드라에서 겪은 고난(행 14:9)과 풍랑과 구조(행 27:27-44)와 연결되어 있지만, 이러한 고난 서사는 바울의 여정에서의 어려움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는 바울의 극복과 승리 서사와 연결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바울의 가르침(행 14:22), 밀레도에서의 설교(행 20:22-23) 등에서 바울이 겪는 고난이 암시적으로 제시된다. 이에 반해서 바울이 자신의 서신에서 제시하는 고난의 묘사는 보다 직접적이다. 예를 들어 고린도후서 11:23-27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했고,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고 자신의 여정을 묘사한다. 바울의 생애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을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러한 여정의 어려움을 거의 보도하지 않는다. 누가복음 13:13-14에서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향하는 바울의 여정은 이와 같이 내륙에서 바울의 여정에서 바울의 어려움을 전혀 묘사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흥미로운 구절임이 분명하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비시디아 속주에서 로마의 식민 도시(콜로니아)로 지정한 여덟 도시 중 하나이며, 여덞 도시 중에서 라틴 시민권(ius italicum)을 해당 도시 시민들에게 수여한 유일한 도시였다.[6] 비시디아 안디옥은 “작은 로마”라고 불리웠고, 황제의 길(비아 세바스테)의 중심 도시(caput viae)로서, 남쪽으로는 버가, 동쪽으로는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와 연결하는 중추 지점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고대의 역사 기술이 역사적 인물들과 사건들의 패턴을 발견하는데 관심이 있다면 비아 세바스테(황제의 길)를 통해서 작은 로마로 불리웠던 비시디아 안디옥에 입성한 바울과 큰 로마(로마 자체)에 입성하는 바울의 모습에 일종의 서사적 일관성을 사도행전 저자가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7]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 저자는 비아 세바스테를 통과하는 바울의 고단함을 묘사하는 것보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입성하는 바울의 당당한 사도로서의 모습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작은 로마’에 입성하는 바울의 모습은 로마로 입성하는 바울의 모습(행 28장)과 평행을 이루면서 하나의 내러티브 패턴을 형성한다.
바울은 사도행전 28장에서 멜리데에서 구조된 바울이 치유와 기적의 사건 이후 신적 이간으로 대접을 받는 묘사를 발견한다. 사도행전 28:11에서 바울이 탄 배가 디오스구로(디오스쿠로이; 즉 쌍둥이 신인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머리 장식을 했다고 묘사한다. 사도행전 저자의 생략과 집중의 서술 전략의 견지에서 볼 때, 배의 머리 장식에 대해서 굳이 기술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디오스구로는 로마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인 레길루스 호수 전투(기원전 495년)에서의 로마의 역사적 승리와 연관된 신들이며, 로마 도시의 중심인 로마 포룸(포로 로마노)에 위치한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에서 숭배되던 신이었다. 사도행전 저자가 디오스구로를 언급한 것은 바울의 로마의 입성을 승리자로서의 입성으로 그리려는 서사적 전략과 연관될 수 있다. 사도행전 28:20에서 바울은 쇠사슬에 매여 있었다는 것이 묘사되지만 그럼에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쳤다(행 28:31).
이와 같이 사도행전의 마지막 구절에서 바울이 담대하게 로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쳤다고 묘사하는 것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승리자로 로마에 입성한 모습에 방점을 찍으려는 사도행전 저자의 역사 기술 전략의 견지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도행전은 1차 유대-로마 전쟁(기원후 67-73년) 이후에 저술되었다. 우리는 유대 전쟁에서 패배한 700여명의 유대인들과 지도자였던 시몬과 요한이 개선식에서 결박된 채 로마 포룸으로 행진했고 이어서 처형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유대 전쟁의 참상과 결과는 팔레스타인에서 도망친 유대인들에 의해서 주변 지중해 지역으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또한 유대 전쟁 이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에 의한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서 유대 전쟁에서 승리한 자신의 업적을 소아시아에서도 홍보했기 때문에 전쟁의 기억은 소아시아 지역에서도 공유되고 있었을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이렇듯 70년 이후에 사도행전의 독자들은 그의 로마 입성의 이미지가 패배자로서의 입성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비시디아 안디옥에 입성한 바울의 이야기는 여정에 있어서의 상당한 생략으로 말미암아서 ‘작은 로마’로의 입성이 비시디아 안디옥-이고니온-루스드라-더베에서의 바울의 선교적 성공과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작은 로마’로의 바울의 입성(행 13장)과 로마 자체로의 바울의 입성(행 28장)은 일종의 평행을 이루면서 자연스럽게 인클루지오를 형성한다. 이러한 인클루지오(행 13장-28장)의 중간에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이 위치하는데, 이것도 또한 사도행전의 구조의 중심에 예루살렘을 위치시키기 위한 사도행전 저자의 전략으로 여길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도행전 후반부의 거시적 구조를 다음과 같이 샌드위치 구조로서 도식화 시킬 수 있다.
작은 로마(비시디아 안디옥)으로의 입성(행 13장)
예루살렘으로의 입성(행 21-24장)
로마로의 입성(행 28장)
이와 같이 로마로의 입성이라는 반복되는 구조는 사도행전 후반부에서 위와 같은 내러티브 패턴을 형성한다. 우리는 이 구조의 중심에 예루살렘이 존재한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즉, 사도행전 후반부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을 지나가는 도시로 여기는 것보다 예루살렘을 여전히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로마로 가는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다(참조: 행 1:4, 8). 누가-행전에서 예루살렘의 장소적 중요성은 이미 여러 차례 논의된 바가 있다.[8]
이러한 여정에서 사도행전 저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바울은 궁극적으로 승리했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읽는 공동체도 현실의 어려움 가운데 있지만, 복음을 들고 보내심을 받은 삶을 살 때 궁극적인 승리가 주어질 것이라는 서사적 패턴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발견해야 했다. 그리고 이 서사적 패턴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동참하도록 격려를 받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도행전이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닌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메시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은 현실의 어려움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두는 것 보다는 그것을 결과적으로 극복해낸 공동체의 소망의 이야기에 초점을 두고 있다. 우리의 현실에도 어려움이 가득할 수 있다. 도무지 희망적인 미래 예측이 가능해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전진했고 교회는 승리의 여정에 있다는 것을 전하기를 소망한다. 행 13:13-14에서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향하는 여정의 생략도 이러한 서사적 전략 속에서 채택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이러한 ‘전략적 침묵’은 여정의 어려움보다 결론적 극복을 묘사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도행전이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을 사도행전의 지리적, 구조적 측면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다.
[1] Wilson, "The Route of Paul's First Journey to Pisidian Antioch," New Testament Studies 55 (2009): 471-483.
[2] 윌슨이 계산한 거리인 156마일을 킬로미터로 환산한 것이다. Wilson, "The Route of Paul's First Journey," 479.
[3] 앗달리아(안탈리아) 근교에서 시작되는 악수(Aksu) 강은 비디시아 안디옥에 이르지 못한다.
[4]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갈 때 클리막스 고개를 넘었을 것이라는 스티븐 미첼(Stephen Mitchell), 데이비드 프렌치(David H. French)와 마크 윌슨의 견해에 필자가 동의했기 때문이다. 프렌치와 윌슨의 견해 이외의 다른 견해에 따라서 버가-뤼르베(Lyrbe)를 지나는 경로도 방문했지만 이 경로는 클리막스 고개를 지나는 경로보다 가능성이 낮다고 필자는 파악한다. 자세한 이유는 다른 지면에서 상세하게 논할 것이다. 행 14:24에서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Pamphylia)에 이르렀다는 언급은 사갈라소스(Sagalassos)를 지나는 길을 통하여 버가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필자는 본다. 위의 소아시아 시도에서 바울의 여정이 사갈라소스를 지나는 것으로 표시하였다. 필자가 사갈라소스를 방문하여 바울의 여정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사갈라소스에서 버가에 이르는 여정은 바울이 택할 수 있는 옵션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돌아오는 길에서 처음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는 길과 다른 여정을 택한 이유는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는 길 중간에 다른 도시들에서의 선교적 사역에서 결실이 없어서 다시 방문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사도행전은 이 측면에 대해서도 묘사하지 않는다.
[5] 예를 들어 다음을 보라. John Percival, “Thucydides and the Uses of History,” Greece & Rome 18 (1971): 199-212.
[6] 라틴 시민권은 로마 시민권보다는 낮고, 속주 시민권보다 높은 지위를 부여하는 시민권이다.
[7] 이러한 해석에 관하여 다음을 보라. Clare K. Rothschild, “Pisidian Antioch in Acts 13: The Denouement of the South Galatian Hypothesis,” Novum Testamentum 54 (2012): 334-353.
[8] 예를 들어 다음을 보라. Eyal Regev, “Jerusalem as the Central Place for Paul and Acts,” Religions 14 (2023): 1-11, htps://doi.org/10.3390/rel14060713. 누가-행전에서 예루살렘의 지리적 중심성의 의미와 함의는 필자의 다른 지면에서 보다 상세하게 검토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