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왜 죽었는가? 경고의 이야기라고 하기에 이 이야기는 지나치게 잔혹한 것이 아닐까?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을 둘러싼 이 난해한 이야기는 현대의 많은 독자들을 당황케 한다. 하워드 마샬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오늘날과 다른 사고의 세계를 도입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1]
해석자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심판과 죽음의 이유를 다양하게 해석했다. 던컨 데렛(J.D.M. Derrett)은 이 본문을 유대적인 배경에서 재산 봉헌의 견지에서 해석한다.[2] 사도행전 4:32-37은 강압적이고 자발적인 방식으로 성도들이 자신의 재산을 교회에 기부하고 사도들이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분배를 한 것을 묘사한다. 이와 같이 초대 교회는 자발적으로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헌납을 했는데, 이것은 ‘신뢰’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재산을 일부만 바치면서 자신들의 재산을 모두 바치는 것과 같이 서약을 했고 이것은 공동체의 신뢰와 성령의 권위를 훼손하는 중대한 범죄였다. 데렛은 “하늘의 손에 의한 죽음”(death at the hands of Heaven)이라는 유대적 개념을 바탕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급작스러운 죽음의 이유를 설명한다.[3] 데렛에 의하면 초대 교회는 신적 처벌을 믿었고 성령을 시험하거나 도전하는 것에 이러한 처벌을 적용하였다.[4]
반면 브라이언 캐퍼(Brian J. Capper)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의 원인을 공동 재산의 불법적 전용으로 여기며 주로 쿰란 문헌에서 그 배경을 발견하고자 한다.[5]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재산 헌납은 단순한 기부가 아니라 조직된 공동 생활(organized common life)의 일부로서 ‘재산 공유’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6] 특히 캐퍼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단순히 속였거나 기만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도행전에서 교회는 특정한 규율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였고 공동체의 질서와 신뢰를 배반했다는 것이 때문에 처벌이 주어진 것으로 여긴다.
필자는 이러한 견해들이 옳은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의 이야기는 여호수아의 아간 이야기(수 7:1-26)와 유사성을 지니는 측면이 있다. 아간과 아나니아는 각각 전리품과 재산을 사적으로 유용하려 시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공동체의 공유 재산을 침해하였다. 본문은 여호수아 7장의 아간 사건과 연결되는데, ‘감추다’라는 헬라어 νοσφίζομαι가 동일하게 사용되었으며, 이는 개인의 죄가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시사한다. 두 이야기 모두 신적 심판이 즉각적으로 임하며, 이를 통해 공동체의 순수성이 강조된다. 특히, 여호수아 7:1의 ‘전리품의 횡령’과 사도행전 5:2의 ‘재산의 횡령’이라는 경제적 요소가 핵심적인 주제로 부각된다. 이러한 사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공동체 내부의 부정을 제거함으로써 정화되는 과정으로 서술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는 성령의 역사로부터 시작된(참조. 행 1:8) 구속사의 이야기에서 성령의 활동을 가로막은 것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로 이해될 수 있다.
필자는 이 사건이 단순한 윤리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아니라, 성령이 주도하는 공동체의 본질을 나타내는 사건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는 교회의 의미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측면을 우리는 고려할 필요가 있다.
첫번째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는 ‘시험과 승리의 패턴’과 연관될 수 있다. 누가-행전의 구조의 관점에서 사도행전은 ‘세례—예수의 시험’(눅 3:21-22; 4:1-13)의 축과 ‘성령 세례—오순절(행 2장; 5장)’의 축이 오버랩된다고 여길 수 있다.[7] 누가는 예수님께 주어진 요한의 세례와 제자들에게 주어질 성령의 임함을 세례는 관점에서 연결시킨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행 1:5). 예수님의 세례 이후에 예수님께 시험이 주어진 것처럼 오순절 성령 세례 이후에 제자들에게도 시험이 주어진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시험은 떡에 대한 시험(눅 4:2-4), 권위와 영광에 대한 시험(눅 4:5-8), 그리고 예루살렘에서의 시험(눅 4:9-13)으로 이루어진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는 재물과 영광에 대한 시험이며 예수님의 마지막 시험과 같이 예루살렘에서 주어진 시험이다. 예수님은 눅 4:1-13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고(πειραζόμενος)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ἐκπειράσεις) 하였느니라”(눅 4:12)고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삽비라에게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πειράσαι)”(5:9)이라고 묻는다. 이것은 마귀가 예수님과 하나님을 시험한 것과 같이 삽비라가 “주의 영”을 시험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시험” 모티프는 예수님의 시험 이야기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에 평행되는 요소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이렇듯,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세례 — 시험’의 패턴을 가지고 있으며, 세례 이후 사단에 대한 승리를 이루는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공통 패턴은 예수님께서 고난과 시험을 겪으셨지만 궁극적으로 승리한 것처럼 교회도 고난을 겪지만 궁극적으로 승리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두번째로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에클레시아’ (ἐκκλησία; 교회)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행 5:11).[8] 사도행전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공동체로 규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니엘 마르게라(Daniel Marguerat)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를 단순한 재산의 횡령이 아니라, 성령에 대한 근본적인 거역을 나타내며, 교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이야기 이해한다.[9] 이러한 관점에서 이 본문은 초대교회의 선교 이야기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내부적 위기에 대한 묘사이며, 공동체의 거룩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개입을 나타낸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도행전 2-5장에서 예루살렘에 모인 공동체는 기독교 공동체의 ‘원형’으로 제시된다. 교회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로서 박해를 받으며(행 8:1, 3), 교회가 평안하며 든든히 서가는 것은(행 9:31) 초기 교회 선교의 중요한 결과이다. 이 전에는 그리스도교인들의 모임을 어떻게 지칭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사도해전 5:1-11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겪은 공동체가 ‘교회’라고 드러나며, 교회의 의미와 정체성이 무엇인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서 ‘한 마음과 한 뜻’(4:32)이 아닌 자들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에서 배제된다(5:1-11). 사도행전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인 ‘한 마음으로’ (ὁμοθυμαδόν)는 사도행전이 전하고자 하는 중요한 개념을 제공한다(행 1:24; 2:46; 4:24; 5:12 등). 사도행전은 하나님 백성은 일치된 가운데 선교적 사명을 수행하는 그룹으로 묘사된다. 교회는 외부로부터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한 마음으로’ 일치된 가운데 계속 성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행 5:1-11는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소유를 공유하는 공동체의 이야기(4:32)와 믿는 사람들이 ‘솔로몬 행각’에 모인 이야기로 둘러 쌓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잘못은 단지 개인적인 속임의 이슈가 아니라 교회의 하나됨을 훼손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세번째로 행 5:1-11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고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저주의 실현”으로 보였을 것이다. 앨버트 하릴(J. Albert Harrill)은 사도행전 5:1-11에 나타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을 고대 지중해 및 근동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위증과 신적 심판의 관점으로 해석한다.[10] 특히 그는 이 사건이 헬레니즘 세계에서 맹세와 맹세를 지키지 않았을 때 주어지는 저주를 배경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고대 사회에서는 신 앞에서 이루어진 맹세를 어길 경우 신적 저주가 따른다는 믿음이 있었으며, 이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즉각적인 심판을 받는 이유를 설명해준다고 하릴은 여긴다.
필자는 하릴의 해석이 타당하다고 여긴다. 고대의 관점에서 “즉각적 심판”은 맹세를 지키지 않은 결과로서 저주가 실현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고대에 “저주”는 흔한 개념이었으며, 단순히 미신으로 여겨진 것이 아니었다. 저주는 조약 혹은 계약과 같은 형식으로 공적으로도 언급될 수 있었다. 저주는 사회의 갈등을 조정하거나 신뢰를 유지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 고대의 저주는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첫번째는 묶는 저주(binding curse)로서 상대편을 묶거나 무력해지도록 선언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마술사 시몬에게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행 8:23)이라고 말한 것은 고대의 관점에서 볼 때 시몬에게 저주가 임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11]
저주의 두번째 개념은 ‘맹세’와 연관된다. 고대의 맹세의 형식은 맹세를 지켰을 경우에 받을 축복과 맹세를 어겼을 때 받을 저주의 문구를 포함한다. 고대의 저주는 자주 죽음과 연관될 수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아나니아가 심판을 받은 것은 맹세를 어긴 이에게 임하는 저주로 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과 유사점이 존재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행 5:5). 이렇게 이해할 때 행 5:6에서 통상적인 장례 절차를 거치지 않고, 심지어 아내인 삽비라에게 알리지도 않은채 아나니아의 시신을 급하게 묻은 것은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아나니아를 ‘저주받은 이’로 이해하고 급하게 시신을 장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동을 ‘성령을 속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5:3, 9)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개인적으로 몰래 기부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는 아마도 기부를 하는 공적인 절차를 나타내는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공동체 앞에서 기부를 하면서 공적인 서약 혹은 선언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인들은 맹세를 어기는 것은 매우 심각한 위반이며, 신으로부터의 징계가 주어진다고 믿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와 같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기부를 개인적인 행동이 아니라 공동체적 행동이며 공적 서약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서약은 맹세로 구성되며, 맹세를 어긴 자에게 중대한 심판이 임한다는 믿음에 따라서 사도행전의 저자(누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동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동에 주어진 하나님의 심판은 이와 같이 “맹세 위반”이라는 측면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심판의 즉각성과 심각성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고대의 재정 관리가 사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서약’이라는 측면에서 공적으로 관리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교회의 재정이 매우 엄중하게 관리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단순한 헌금의 문제나 교회 지도자와의 갈등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에서 비롯된 심각한 영적 위기를 드러낸다. 본문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성령을 속였다”, “하나님께 거짓말했다”, “주의 영을 시험했다”는 표현들은 이 사건의 본질이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과 기만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 사건을 통해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을 먼저 의식하며 진실과 거룩을 지켜야 함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또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이후 성도들은 큰 두려움을 느꼈으며, 이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는 더욱 정결한 공동체로 세워졌고, 믿는 자들이 증가하는 결과를 낳았다(행 5:12-14).
우리는 이 글의 처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의 이야기가 현대 독자들에게 잔혹하게 보인다는 점을 고려하였다. 이러한 잔혹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몇 가지를 고려하였다. 앞서서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가 누가복음-사도행전의 시험-승리의 패턴과 연관된다는 것을 관찰하였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시험은 특히 교회의 재정과 관련하여 주어진다. 초기 교회에서 재정이라는 요소는 공적인 요소로 여겨졌고 매우 엄중하게 다루어졌다. 현대 교회에도 재정과 관련된 시험이 있을 수 있다. 교회는 재정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자신이 영광받는 것에 대한 시험을 극복하신 것과 같이 현대의 교회와 신자들도 자기 자신이 영광받는 것에 대한 시험을 극복하도록 도전을 받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교회는 재정에 관한 시험에서 승리했는가?”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교회의 호칭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과 시험의 이야기 이후에 비로소 주어지는 것을 관찰한다(행 5:11). 교회는 우리에게 주어진 재정의 ‘청지기직’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재정에 대한 시험이 있었지만 예수님과 ‘교회’는 이 시험을 이겨낸 것으로 누가-행전은 전한다. 현대의 교회는 초기 교회가 자신의 재산을 나누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없었던” 것(행 4:32)을 기억하고 있는가? 현대의 교회는 초기 교회와 같이 돈의 문제에서 초연해질 수 있는가?
필자는 저주와 관련된 해석을 할 때, 우리의 사적인 잘못과 죄에 대한 정죄감을 가중시키도록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선언을 갈라디아서 3:13에서 발견한다. 갈라디아서 3:10-14도 사도행전 5:1-11과 같이 고대의 저주에 대한 개념을 배경으로 하며, 이러한 저주의 개념에 익숙했을 고대의 독자들에게 바울은 믿는 자들이 저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선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모든 저주의 사슬에서 우리는 구해내셨다.
른 한 편으로는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한 죄용서’라는 가르침이 공적인 잘못도 눈감고 넘어가자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맹세와 저주의 견지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는 매우 공적인 이야기로 여길 수있다. 사도행전 5:1-11은 갈라디아서 3:10-14과 다른 맥락에서 서술되고 있다. 사도행전 5:1-11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잘못은 공동체에 대한 잘못이며, 공적인 측면을 지닌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5:1-11은 ‘공적 윤리’라는 측면에서 고려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은 공적인 잘못에 대한 권징을 실시하고 이러한 권징이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우리는 벨직 신앙 고백에서 교회의 3대 표지를 설교, 성례, 치리로 정의한 것을 알고 있다. 공적 윤리는 ‘치리’와 불가분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권징’이라는 것이 현대의 교회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들을 우리는 종종 본다. 교회가 길을 잃었을 때 교회가 공동체와 사회 속에서 분명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있다면 이러한 잘못과 선을 긋고 권징을 실시하고 성도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
[1] 하워드 마샬, ⸢사도행전⸥ (왕인성 역; 서울: CLC, 2016), 178-179.
[2] J.D.M. Derrett, “Ananias, Sapphira, and the Right of Property,” Downside Review 89 (1971): 225–232.
[3] Derrett, “the Right of Property,” 229-231.
[4] Derrett, “the Right of Property,” 229.
[5] Brian J. Capper, “The Interpretation of Acts 5.4,”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 6 (1983): 117-131.
[6] Capper, “Acts 5.4,” 117.
[7] Alfons Weiser, Die Apostelgeschichte (Ökumenischer Taschenbuchkommentar 5/1; Gütersloh: Gerd Mohn; Würzburg: Echter, 1981), 146.
[8] 이 점에 관하여 다음을 보라. Daniel Marguerat, “La Mort d’Ananias et Saphira (Ac 5.1-11) dans la Stratégie Narrative de Luc,” New Testament Studies 39 (1993): 209-226 (특히 216 페이지를 보라).
[9] 마르게라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사도행전 5장)을 여호수아 8장의 아간 이야기보다는 창세기 3장의 원죄 이야기와 연결하려고 한다. Marguerat, “La Mort d’Ananias et Saphira,” 217.
[10] J. Albert Harrill, “Divine Judgment against Ananias and Sapphira (Acts 5:1–11): A Stock Scene of Perjury and Death,”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130 (2011): 351–369.
[11] 또한 행 13:4-12을 보라. 사도행전에 나타난 저주 모티프에 대해서 다음을 보라. Benedict H.M. Kent, “Curses in Acts: Hearing the Apostles’ Words of Judgment Alongside ‘Magical’ Spell Texts,”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 39 (2017): 412–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