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사도행전 1:6)

행 1:6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는 질문이 제자들의 오해라는 통념에 도전하며, 오히려 사도행전 전체의 핵심 주제를 압축한 발언으로 뒤집어 읽을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전복적 읽기는 교회가 유대교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예언된 이스라엘의 사명을 '성취'하고 회복하는 과정임을 설명하는 책이라고 분석한다 이는 또한, 왜 사도행전에서 유대인에게는 '전도'의 역할이, 이방인에게는 '환대'의 역할이 부각되는지와 같은 민족별 역할 분담의 패턴을 해명한다.

사도행전을 읽을 때 가장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전제 중 하나는 사도행전은 이방인 독자들을 위해서 저술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도행전이 이방인 선교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고, 교회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을 표현하는 듯한 구절들이 다수 존재하며, 교회가 유대인들의 구속사적 지위를 ‘대체’했다는 소위 ‘대체신학적’ 내용을 사도행전이 표현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의 학자들은 사도행전에서 유대적인 기원이 중요하다는 점에 점차 동의하기 시작했다.[1] 또한 사도행전이 염두에 둔 ‘내포 독자’가 이방인 혹은 이방인 회심자들, 혹은 이방인 경외자(아직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유대교에 호감을 가지고 회당에 정기적으로 출입하던 이방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은 선교적 역할을 감당한 교회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이스라엘의 사명을 성취했다는 것을 유대인 독자들에게 설명하는 책일 수 있다.[2] 기독교는 본래 유대적인 뿌리를 지녔다. 기독교와 유대교가 분리되는 것은 1세기 후반부터 2세기 초반까지의 지속적이고 오랜 과정이었다. 필자는 이렇듯 기독교와 유대교가 분리되는 과정 가운데(즉, 완전히 분리되기 이전에) 저술되었다고 여긴다. 이렇듯 사도행전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대적인 측면을 나타내며, 이러한 측면에서 사도행전을 해석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특히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선교적 사명’와 관련하여 간략하게 우리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은 아직 복음을 깨닫지 못한 제자들의 어리석은 질문이 아니라 사도행전의 핵심을 표현한 질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물론 사도행전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당대 유대인들과 같이 군사적, 정치적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사도행전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며, 이것이 어떻게 사도행전의 주제를 형성하는지 필자가 기고할 몇 편의 글들(행 28:13에 대한 재해석을 포함하여)을 통해서 간략하게 해명하게 될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사도행전은 유대인 독자들을 위해서 쓰여졌다고 필자는 가정한다. 먼저 사도행전의 일차적인 독자들이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략하게 생각해보자. 사도행전의 저자(누가)는 사도행전을 통해 교회가 이스라엘의 계승자임을 강조하며, 그의 기록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연속성을 변증하는 데 초점이 있다. 따라서, 사도행전이 이방인 선교를 강조하면서도 유대적 요소를 내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다음의 구절들을 보라: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눅 1:54-55)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눅 1:68-75)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눅 19:9)

누가복음에서는 예루살렘이 구원의 출발점으로 제시된다(눅 24:47).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으며(눅 2장), 복음서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누가복음은 예루살렘에서 부활과 승천 사건을 기록하며, 제자들이 성령을 기다리도록 명령받았음을 강조한다(눅 24:49). 예루살렘은 사도행전에서도 초대 교회의 중심지이며, 중요한 신학적 논의가 이루어지는 장소(행 15장)로 등장한다.

누가가 예루살렘을 강조하는 이유는 기독교가 구약의 성취이며, 이스라엘의 참된 회복을 가져온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는 유대교적 전통을 이어받아 예루살렘을 신앙의 중심지로 보되, 복음이 그곳에서 시작해 모든 민족에게 퍼져 나간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누가복음은 단순히 유대인이나 이방인 중한쪽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주장한다. 누가복음-사도행전은 기독교가 유대교와의 공통된 신앙적 토대 위에 서 있으며, 유대적 유산을 존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3]

누가복음이 유대인(특히 유대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쓰였다고 가정하면 여러 특징이 이해된다. 첫째, 누가복음은 바리새인에 대한 비판을 줄였다. 이는 독자가 바리새인과 가까운 유대인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둘째, 누가-행전에서 ‘이스라엘’은 유대 백성을 지칭한다. 셋째, 누가복음에서는 정결법을 부정하는 예수님의 대조법(예: 마 5:21-48)이 생략되었다. 이는 정결법에 민감한 유대인 독자들에게 거부감을 줄이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넷째,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 쓰였음에도 함락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이는 예루살렘의 중요성을 여전히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눅 1-2장에서 예수님의 유대인 정체성을 강조하는 장면(할례, 성전 방문 등)이 많다. 누가복음에서만 예수님께서 할례 받으신 분이라는 묘사가 나타난다(눅 2:21). 또한 누가복음에서만 예수님께서 ‘모세의 법대로’ 정결 예식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다는 것이 묘사된다(눅 2:22-23). 여섯째, 누가-행전에서 ‘형제’라는 호칭은 항상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된다(이 측면은 필자의 다른 글에서 보다 상세하게 검토될 것이다). 일곱째, 사도행전은 “이스라엘의 소망”에 특별한 관심을 둔다(행 28:20). 이는 사도행전이 저술되던 시기에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와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결론적으로, 누가-행전은 유대인 독자를 대상으로 기록되었으며, 구약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에서 성취되었음을 변증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누가의 전략은 유대교와의 공통 분모를 강조함으로써 기독교가 유대교의 참된 계승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목적은 유대인들을 배제하거나 비판하고 유대인들의 구속사적 특권이 교회로 이전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설득하고 복음 안으로 초대하려는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에릭 바레토(Eric Barreto)가 지적한 바와 같이 사도행전이 관심을 두는 것은 민족적 차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공존하는 것이다.[4] 오순절 사건(행 2:5-11)에서 각 민족들의 명단(Table of Nations; 2:9-11)이 제시되며, 각 민족의 언어로 방언을 하는 것은 성령님이 민족적 차이를 제거하지 않으시는 것을 나타낸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행 10장)을 통해서도 이방인들을 구원 역사 안으로 초청을 받지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공존한다. 바레토는 행 16:1-5에서 디모데의 할례가 디모데의 민족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게 필요에 따라서 조정(협상)된 것으로 여긴다.[5] 바레토는 사도행전이 민족과 관련하여 네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고 언급한다.[6]

  1. 인종(race)과 민족적 차이(ethinicity)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2. 인종과 민족적 차이는 기독교 공동체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3. 인종과 민족적 차이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4. 인종과 민족적 차이는 성경 해석에 깊이 영향을 미친다.

이와 같이 사도행전에서 교회는 민족적 정체성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포용하는 모습 나타낸다고 바레토는 여긴다.

한국인들은 이미 오래전에 단일 민족으로 자신들을 여겨왔고, 한국이 다문화 사회에 이제 막 진입했기 때문에 ‘민족의 관점에서 읽기’ (ethnic reading)에 한국인들은 익숙하지 않다. 게다가 한국인들이 해외로 가지 않는다면 유대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유대적, 민족적 관계에 관심이 적을 수 있고 초기 교회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가 중요했다는 것을 간과하기 쉽다. ‘민족’이 근대적 개념이라고 할지라도 고대에도 종족 혹은 시민 등 공통 서사를 보유한 그룹들 간의 구분이 중요한 요소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사도행전을 ‘민족적’ 측면에서 조망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사도행전을 읽는 것이 사도행전을 저술한 원래의 저술 목적과 전략에 부합한다고 필자는 여긴다.

이것을 토대로 필자는 다음의 측면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전통적인 한국 교회의 선교 개념에서는 선교를 전도와 어느 정도 동일시한다. 필자는 전도는 말할 나위없이 중요한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성도들이 전도에 대한 사명을 받아들이고 이것에 헌신하기를 필자는 소망한다. 사도행전에서 전도는 중요한 주제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복음 전도를 받은 이방인들이 전도를 하거나 이방인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부여하는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 분명히 시간이 지나면서 전도의 역할은 이방인들에게 자연스럽게 이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초기에는 이사야 52:7과 같은 말씀을 근거로 복음 전파의 역할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생각되었을 수 있다. 현대의 교회와 달리 초기 교회는 구약성경의 이스라엘을 이방인 교회와 즉시 동일시하지 않았다. 사도행전이 저술되던 시기에 사도행전의 저자(누가)의 공동체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연합된 공동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두 민족 사이의 차이점이 존중되고 인정되던 공동체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은 민족적 구분을 제거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으며 기독교인들을 제 3의 종족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사도행전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각기 다른 역할(배역)을 맡고 있다. 우리가 전도를 더 잘하기 위해서 사도행전에서 선교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필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 전도의 사명은 사도행전에서 유대인들이 수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전도는 사도행전에서 묘사하는 ‘유일한’ 선교적 주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사도행전에서 선교는 전도와 더불어서 구제, 환대 등의 주제와 더불어 등장한다.[7] 필자는 전도를 더 잘 할 수 있기 위해서 구제와 환대가 사도행전의 선교적 주제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사도행전에서는 전도를 받은 이방인 그리스도교인들이 다른 이방인들을 전도하는 장면이 묘사되지 않는다.[8] 사도행전에서 이방인들의 역할은 박해는 현실 가운데에서 고난을 받는 타자를 보호하고 환대하는 것과 연관된다. 예를 들어서, 이 점은 행 28:1-10에서 멜리데(몰타)인들에 대한 묘사에서도 발견된다. 지중해 문명의 주변부에 있었고 미신적이고 무례한 야만인과 같이 알려졌던 멜리데인들이 교양 있는 친절과 환대를 제공한다.[9] 이것은 당대의 민족적 편견을 뛰어넘는 묘사이다. 행 28:1-10에서 환대는 새로운 가족 관계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매우 선교적인 주제로 생각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도행전에서 전도는 선교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전도만이 선교가 아니다. 오히려 사도행전에서는 인간애(philanthropia)를 통하여 타자를 환대하는 것도 선교의 중요한 측면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함께 이스라엘을 구성하지만 이들은 구별된 역할을 맡고 있다.

다시 행 1:6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예수님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 질문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때와 시기”였다. 필자는 사도행전의 핵심 주제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과 근본적으로 관련된다고 여긴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하나님 나라의 진전으로 사도행전에서 표현된다. 물론 이것은 전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그런데 다른 한편 사도행전에서 하나님 나라의 진전은 ‘일치’와 ‘연대’라는 주제와 연관된다. 성령은 하나되게 만드시는 분이시다. 사도행전에서 성령님은 연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행 2:42-47, 4:31-32).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은 바울과 베드로와 같은 지도자들도 연합하게 하시는 분이시지만 유대인과 이방인들도 연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사도행전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각기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누가 더 우월한가의 이슈가 아니다. 차이점은 존중되어야 했다.

사도행전 1:6에서 제자들이 예수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이까?”라고 질문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이를 정정하거나 부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성령을 통해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하셨다. 사도행전에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승리주의적 확장주의적인 주제 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양적 증가 만을 나타내지 않는다. 교회의 수 혹은 교인들의 수가 많아지는 것 만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나타내지 않는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교회가 단순히 전도 활동을 통해 신자를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이루어 가는 공동체로서의 본질적 역할을 감당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러한 회복은 개인의 구원 뿐 만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에서의 연합과 화해, 그리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는 사회적 책임을 포함한다. 초대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루어 갔듯이, 현대 교회 또한 다양한 배경을 지닌 이들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체성을 형성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며, 타자를 환대하는 실천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야 한다. 즉,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단순한 복음 전파를 넘어 사랑과 연대, 사회적 화해를 통한 ‘만물의 회복’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교회는 이를 실천적 차원에서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다.

[1] 예를 들어, Isaac W. Oliver, Luke’s Jewish Eschatology: The National Restoration of Israel in Luke-Act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21).

[2] 이 관점에 관하여 다음의 저서는 이미 고전이 되었다. Jacob Jervell, Luke and the People of God: A New Look at Luke-Acts (Minneapolis: Augsburg Publishing House, 1972). 또한 다음을 보라. Jacob Jervell, The Theology of the Acts of the Apostl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3]  누가복음의 독자층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전통적으로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했다고 보거나, 하나님 경외자(God-fearer)를 위한 기록이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John Nolland). 누가가 히브리어식 표현을 헬라어식으로 바꾼 점(예: ‘랍비’ → ‘퀴리오스’ 또는 ‘에피스타테스’, ‘골고다’ → ‘크라니온’)이나, 아브라함이 아닌 아담에서 시작하는 족보, LXX(70인역)에서의 구약 인용 등은 그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누가복음이 이방인 독자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필로(Philo of Alexandria)처럼 히브리어를 잘 모르는 유대인도 존재했으며, 누가가 디아스포라 유대 그리스도인을 염두에 두었다면 헬라어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설명될 수 있다. 아담에서 시작되는 누가복음에서의 족보(눅 3:38)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마태복음의 족보(마 1:1-2)와 다르지만, 유대문헌에서 아담은 이스라엘의 대표로도 해석된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아담이 족보의 시작으로 제시된다는 점을 통해서 누가-행전의 원독자가 이방인이라고 반드시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

[4]  Eric D. Barreto, “Negotiating Difference: Theology and Ethnicity in the Acts of the Apostles,” Word & World 31 (2011): 129–137. 보다 상세한 정보는 다음의 단행본을 보라: Eric D. Barreto, Ethnic Negotiations: The Function of Race and Ethnicity in Acts 16 (WUNT 2/294; Tübingen: Mohr Siebeck, 2010).

[5] Barreto, “Negotiating Difference,” 133-134.

[6] Barreto, “Negotiating Difference,” 136-137.

[7] 르네 파디야가 선교는 단순히 전도가 아니며 ‘하나님 나라를 역사 속에서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말한 것은 사도행전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고 필자는 본다. 파디야에게 하나님 나라는 단순한 영적인 개념을 넘어서 인간과 피조계의 변화(새창조)를 동반하는 보다 총체적 개념이다. 이러한 이해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선교를 하나님의 구속적 목적을 전체 창조 질서 속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C. René Padilla, “The Mission of the Church in Light of the Kingdom of God,” Transformation 1 (1984): 12-20.

[8] 흥미롭게도 바울 서신에서도 이방인 독자들에게 전도를 하라고 명령하거나 권면하지 않는다. 바울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전도를 권면하지 않는 이유는 바울 학자들 사이에서 오랜 논쟁거리였다.

[9] Joshua W. Jipp, Divine Visitations and Hospitality to Strangers in Luke-Acts: An Interpretation of the Malta Episode in Acts 28:1-10 (Novum Testamentum Supplements 153; Leiden: Brill,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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