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미국 남장로회[남장로회]의 한국선교 시작의 역사를 재구성하려고 한다. 1891년 10월 내슈빌에서 열린 미국신학교선교연맹 연례대회에서 언더우드의 연설부터 1892년 11월 8인의 선발대가 첫 선교지부인 서울에 도착하여 선교회를 조직하고 한국어를 배우던 1894년 초까지를 다룬다. 이 논문은 남장로회의 한국선교 시작에 영향을 준 인물과 사건의 다양한 역사적 조각들을 연결하여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제시한다. 곧 남장로회 한국선교의 시작 역사를 재검토하여 다시 쓰면서 기존 서술의 오류를 바로잡고 새로운 사실을 추가했다. 1893-94년 남장로회의 호남 진출을 위한 탐사여행은 한국인 어학교사와 조사의 신분 확인 관점에서만 다룬다.1장은 기존 서술을 약술한 후, 남장로회의 한국선교의 기원을 검토한다. 언더우드가 밴더빌트대학교에서 열린 제8차 미국신학교선교연맹 연례 대회에서 한국선교에서 연설하고, 확신하지 못하는 남장로회 해외선교실행위원회를 설득하려고 형 존 언더우드의 지원책을 제시했다. 레이놀즈와 전킨과 데이비스의 고향이자 남장로회의 해외선교 운동의 중심지인 버지니아주에 가서 함께 여러 도시의 교회를 돌며 연설하고 한국에 관한 관심을 고취했음을 강조한다. 남장로회는 유럽 선교를 중단한 시점에서 북장로회의 한국선교 성공에 고무되어 한국을 새 선교지로 선택하였다. 2장은 언더우드와 선교사 지망생들의 버지니아주 순회 사역을 배경으로, 1892년 7월 주미공사 이채연의 부인 배선의 세례와 남장로회 한국선교의 관계를 상술한다. 나아가 워싱턴 주미 공사관과 버지니아주 로어노크대학이 한국선교의 출발에 일정한 역할을 했음을 밝힌다. 3장은 지금까지 제대로 언급하지 않은 커메런 존슨 목사의 활동을 다룬다. 그는 배선의 세례 계획을 세운 장본인이었고, 개인 자격(노회 후원)으로 1892년 10월 부산에 먼저 입국했으며, 1892년 10월 18일에 리니 데이비스와 함께 서울에 들어온 첫 남장로회 선교사였다. 그러나 노회의 지속적인 지원이 없어 1892년 봄 일본으로 선교지를 옮겼다. 4장은 첫 공식 선교사인 데이비스의 내한과 이어서 도착한 선발대 6인의 서울 정착 과정과 서울 선교지부의 설립을 서술한다. 쟁점인 어학교사는 정해연, 장인택, 이채연, 이채원 등의 설이 있으나, 그를 최병헌의 친구로 천주교에서 개종한 박서방으로 확인한다. 결론에서는 남장로회 한국선교회의 정착, 네비어스 방법의 채택, 호남 선교지부 선정에서 마페트의 역할을 강조한다.